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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03 두 개의 여성만화, 작품리뷰 « 이전글 | 다음글 »
 
[신체적 접속에 대한 짧은 회상] 정송희 - 환영받지 못하는 트라우마를 기록하다
| 2004년 07월 19일에 메리메리 쓴 글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완결) / 정송희
 연재 : 오즈/박카스 1999-2000 
 단행본 : 새만화책(1-완), 2004

 

 

 

 

 


이 만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 만화 속에 그려진 여성의 상태, 그리고 이 만화를 그리고 있는 여성 작가의 상태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은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고려하면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려운 만화다. 캐릭터가 선명하지 않으며, 내용은 결말이 예측 가능하게 전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끄는 부분이 있다면,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을 관통하는 정서 때문인데, 여성적인 수동성이 그것. 작가는 성폭력처럼 여자들의 수동적인 성격에 큰 영향을 끼친 트라우마적인 성적 경험들을 다룬다. 이 수동성은 성차별적인 문화 때문에 여성들의 한 경향으로 나타난다고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나탈리 에니크는 [여성의 상태](동문선)라는 책에서, 소설 속 여성주인공들의 삶을 분석하면서 여성들을 규정짓는 특질 중의 하나로 수동성을 꼽았다. 남자들에 비해 생활에 늘 제약이 뒤따르기 때문에 자연스레 수동적인 경향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작가가 트라우마를 다루는 방식은 꽤 정석적인데, 몸의 접촉들이 부르는 일련의 회상들을 통해 과거를 헤집는다.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은 여자가 자신의 가슴을 더듬는 남자의 손을 어렵사리 떨쳐낸 후 여자와 남자가 각각 성적인 접촉에 대한 최초의 기억을 되살리는 내용이다. 당연하겠지만, 성에 대한 두 사람의 기억은 대조적이다. 여자가 같은 반 여자아이를 성희롱하는 선생님에 대한 공포를 떠올리는 반면 남자는 이웃집 여자아이를 성추행하는 기억을 떠올린다. 성과 관련된 여성들의 기억은 괴롭고 움츠러들게 만드는 그 무엇으로 여겨진다.

[팬티 빠는 아침]에서 여자아이는 생리 기간이 아닌데 팬티에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처녀막이 터졌기 때문에 결혼하면 소박맞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괴로워한다.

[그게 뭔지 몰랐어]에서 여자는 엠티에서 친하게 지냈던 남자에게 강간당하지만 그 경험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상대를 피하기만 하는 여자에 대해 남자는 ‘힘들다’고 말하고, 이후 그녀와 사귄 남자 역시 그녀의 경험과 감정을 제대로 수용해주지 않는다.

[관계]에서 가족들을 부양하면서도 늘 무시당하는 여자는 “너무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주기만 한 사람은 분노도 거부도 할 수 없다”라고 읊조린다. 그녀들은 수동적이며,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많은 여성들이 처하는 상태 중에서 피해자의 위치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 같은 상태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질수록 줄어들지만, 성차별적인 문화가 완벽하게 근절되지 않듯 현실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작가가 다루는 성적인 경험들은 주인공의 감정과 자의식 속에 함몰되어 있어서, 작가 자신이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기 때문에 힘겹게 노력해서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인상을 준다. 몸이 기억하는 회상과 감정들은 과거의 어느 한 장면에 박혀있으며 경직되어 있다. 아직 확실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그림체도 이 같은 인상에 한 몫 한다. 오줌 싸기에 대한 금기를 다룬 [유년의 뜰]이나, 콘돔에 대한 금기를 다룬 [풍선]은, 이제는 약해졌을 법도 한 사회적인 금기를 지나치게 단단한 것으로 다루고 있어서 독자들의 공감을 부르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2004년에 읽기에는 이전 세대의 감성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각 단편들이 1999년부터 2000년까지 만화잡지 [오즈]나 동호회지 [바카스]등 에 비정기적으로 연재된 것을 고려하면 이해가 갈 법도 하다.

물론 과거의 감정에 박혀 있기에 오히려 리얼하게 다뤄진 에피소드도 있다. [그게 뭔지 몰랐어]에서 과거 강간을 당했던 바닷가에서 다른 남자와 스킨쉽을 하다가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장면이나, 갑작스레 결혼하자고 하는 남자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어려워하는 장면이 그렇다. 아직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 단계에 있기 때문일까, 작품에서 드문드문 발견되는 긍정적인 전망은 힘겨운 과거의 기억들에 비해 다소 쉽게 찾아오며, 착한 개인에게 희망을 가진다는 점에서 소박하다. 인절미처럼 통통하게 찐 뱃살을 걱정하는 여자는 자신의 뺨에 뽀뽀하는 남편 때문에 행복해하고, 살이 찐 누드모델은 남자 학생들의 비웃음에 괴로워하다가 과거 누드화에 등장한 여인들의 풍성한 몸을 바라보며 자신감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여성만화들 가운데 여성의 몸과 성적 경험에 대해 다룬 작품들이 거의 없다시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대 여성의 현실을 잘 다루는 작품으로 손꼽히는 한혜연의 [금지된 사랑] 역시 어긋나는 사랑과 관계들을 잘 다루고 있지만 정작 성관계를 맺는 장면 같은 자극적인 부분들은 빠져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신체적…]은 성적 경험을 정면으로 그리고는 있지만, 자신의 과거에 박혀있는 듯 경직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정송희가 아닌 여성작가들이 만일 성적 경험을 다루었다면, [신체적…]보다 기술적으로는 더 뛰어난 성취를 거둘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녀의 만화가 보여준 상처와 수동성의 감성에서 완벽하게 뛰어넘기란 어렵지 않았을까, 라고 추측케 한다. [신체적…]은 작가의 첫 작품집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작가가 경험을 얼마나 작품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 소박한 전망을 어떻게 힘 있는 것으로 변화시킬지를 기대해도 좋을 성 싶다(그런데 첫 작품집이 약 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왔다니, 지금 작품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 인터넷 저널 [일다](http://www.ildaro.com)에 게재된 기사의 수정보완


○ 관련 사이트
정송희 작가 블로그 http://blog.naver.com/songmadame.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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